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맞이한 소년 시절, 김규옥은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잠시 장사꾼의 삶을 살기도 했고, 용산에서의 야인시대를 겪기도 했으나, 성공을 향한 김규옥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고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딛게 했다.

낙향한 광주에서 김규옥은 서울에서 못다 이룬 디자이너로서의 꿈에 도전한다.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제2의 블란서 파리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현대사는 그의 꿈을 펼치도록 놔두지 않았고, 예기치 않게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온몸으로 경 험하게 된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경험한 그는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라는 고백과 함 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1서 1장 17절)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은 생명의 복음으로 그 영혼을 뜨겁게 달구었고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후 그는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내린 복음의 그물”을 노숙자들과 부랑아 청소년들을 향해 펼친다.

청소년 탈선의 소굴이었고, 동성애와 사창가 같은 성적 타락의 현장이 되어버린 성거산 주변 광주공원을 보며 이 땅의 '소돔과 고모라'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에 이른 김규옥은 이후 30여 년을 노인과 청소년 복지를 위해 '사랑의 식당등을 운영하는 데 온몸을 바치게 된다.

시민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시민사회단체총연합회를 결성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도청 이전 반대를 위한 노력 을 기울였으며, 뜻하지 않는 일로 감옥에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규옥은 감옥에서도 '신고식 철폐'라는 악습을 타파하였다.

또한, 광주광역시기독교교단협의회를 통한 교회 일치 와 연합운동을 펼침으로 광주지역 복음화에 투신한다.

이후 거듭된 행정과 관리의 실수로 노인과 청소년 공동 체의 대명사인 사랑의 식당을 문 닫게 된다. 관리자의 법인도용과 사랑의 식당 운영의 중단은 김규옥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와 실패들도 복음의 열정을 향한 김규옥의 발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비록 복지 사업의 좌절과 그로 인해 '광주에서 복지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그는 회피 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다. 지나온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제3막 인생을 향해 달려간다. 100원의 경제와 생산적 복지를 통해 교회 자립의 꿈을 다시 꾼다.

이처럼 복음을 통한 다음 세대의 복지를 이루겠다는 김규옥의 열정은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 광주광역시 기독교교단협의회와 노회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인생 4막을 꿈꾼다.

김규옥!

한때는 거지들과 함께 지냈고, 때로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디디기도 했다. 젊은 시절 패션계의 기대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사람을 살리는 전도자요, 어려운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고 돕는 복지가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작은 예수라 할 것이다. 이제 김규옥 목사의 자전적 고백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